칼럼

[유진모의 테마토크] 별세 김광한, K팝에 DJ란?
2015. 07.10(금) 10:39
시크뉴스 포토
[시크뉴스 유진모의 테마토크] ‘팝스 다이얼’ ‘추억의 골든 팝스’를 통해 1980∼1990년대 라디오 애청자들에게 주옥같은 팝송을 전해주던 DJ 김광한이 69살의 나이에 9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평소 심장질환을 앓던 고인은 지난 6일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다 이날 오후 9시37분께 결국 세상을 떴다.

이종환이 일찍이 MBC의 간판 DJ로서 KBS의 가수 출신 하남석과 맞대결하며 1970년대를 풍요롭게 만든 라디오 팝송프로그램은 1980년대를 넘어오며 MBC 내에서 김기덕이 급성장했고 KBS는 김광한이 정통파 DJ로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며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다.

김광한은 19세의 나이에 음악전문 업소 등에서 DJ로 활동했으며 그 실력을 바탕으로 서라벌예대를 졸업한 뒤 DJ로서 꿈의 무대인 지상파 방송사 라디오 FM으로 진출한 것.

그는 KBS 2FM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1982∼1994년)과 ‘김광한의 추억의 골든 팝스’(1999년) 등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으로 이른바 팝의 전도사로서 팝문화의 선두에서 애호가들을 이끌었으며 KBS 2TV ‘쇼 비디오자키’(1987~1991)를 진행하며 DJ로서는 최고의 업적을 이뤄냈다. 그 중에서 1988년 ‘88 서울올림픽’ 공식 DJ를 맡았던 것은 최고의 영광이기도 했다.

이종환과 김기덕은 MBC 공채 라디오 PD 출신, 황인용은 TBC 아나운서 출신, 그리고 하남석은 가수 출신인 것과 달리 고인은 정통 DJ 출신으로서 팝에 해박한 지식과 남다른 애정으로 팝 관계자 및 대중음악 관계자들과 밀접한 스킨쉽을 해온 것으로도 돋보인다.

1970~80년대 팝문화 전파와 동시에 동호인들의 결속력을 다져준 팝 전문 월간지 월간팝송 뮤직라이프 등의 관계자들과도 깊게 교류하며 좋은 팝송을 널리 알리며 젊은이들의 정서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Disc Jocky의 줄임말인 DJ는 가수 연주자 작곡자 등의 뮤직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대중음악의 전도사라는 점은 확실하다. 지금처럼 가수들이 넘쳐나고 TV 채널이 수백 개가 넘실대기 전의 문화적 혜택이 척박하던 시절엔 분명 그들은 지금의 아이돌에 못지않은 스타였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우리나라에는 주한미군방송인 AFKN이 설립됐고 주한미군부대 인근에 나이트클럽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팝송이 급물살을 타고 대중의 문화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었다.

용산 혹은 경기도 일대의 주한미군부대 주변에 살거나 그곳을 출입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 외에 팝송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애호가를 위해 시내 곳곳엔 소위 음악다방과 뮤직레스토랑이 창궐하게 됐다. 그리고 DJ에 대한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나름대로 재야의 고수들인 팝 마니아들이 음악전문 업소로 진출하고, 그 분야에서 스타 대우를 받으며 DJ문화를 형성한다.

당시 업소를 찾은 고객들은 쪽지에 신청곡을 적어 DJ에게 음악을 틀어줄 것을 요청하곤 했는데 자신들이 원하는 팝송을 빨리, 꼭 듣기 위해 담배부터 맥주까지 ‘뇌물’을 주는 게 풍토로 자리 잡을 정도였고, 고객과 DJ 사이의 로맨스도 심심찮게 이뤄지곤 했다.

오죽 DJ가 인기 있었으면 윤시내는 ‘DJ에게’라는 곡을 취입해 크게 히트시키기도 했다.

DJ에게도 요즘 아이돌처럼 퍼포먼스가 있는데 그건 오디오에 걸 LP를 고르는 동작이다. 당시 팝송을 가장 고급스럽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일체형의 컴퍼넌트가 아닌, 각 파트 별 고급 장비를 절묘하게 조합한 재생장치를 통해 LP(원판)로 듣는 것이었다. 물론 팝송이 정식 라이선스를 통해 수입되지 않던 시절엔 속칭 백판(불법복제판)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었는데 음질은 조금 떨어질지언정 낭만과 음악의 본질은 보장됐었다.

음악감상실의 경우 보통 수천 장의 LP는 기본으로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수직으로 주욱 진열돼 있는 LP의 얇은 단면을 일일이 읽을 수 없으므로 손가락을 이용해 원하는 LP가 있을 즈음한 곳의 각 LP들을 재빠르게 일일이 뽑아내 앞면을 확인하며 찾아내는 동작을 보이곤 했다. 그 동작이 가장 빠를수록 뛰어난 DJ라는 인식이 애호가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갔다.

DJ들은 가장 많은 대중이 원하는 곡을 틀기 마련이었지만 그게 금과옥조는 아니었다. 자신의 해박한 음악적 지식을 뽐내기 위해 대중적으로 크게 히트한 아바(ABBA)같은 주로 이지리스닝 계열의 음악보다는 록의 장르 중에서도 프로그레시브록처럼 좀 어려운 넘버들을 선곡하곤 했다.

그렇게 해서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한 게 바클리 제임스 하비스트의 ‘Poor man's moody blues’, 텐 이어즈 애프터의 ‘I'd love to change the world’, 오시비사의 ‘Why’ 등이다. 일반 대중은 레드 제플린 하면 ‘Stairway to heaven’을 떠올리지만 마니아들은 ‘Since I've been loving you’를 더 선호한다. 다 DJ들이 일군 문화 패턴 중 하나다.

하지만 이태원을 중심으로 클럽문화가 발전하고 디스코가 유행하면서 DJ문화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더니 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언더그라운드에선 헤비메틀이 유행하는가 하면 이태원과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가라오케를 통해 춤추는 DJ들이 트렌드의 중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 DJ들이 음악감상실의 뮤직부스 안에서 소극적으로 음악만 틀던 형식을 탈피해 가라오케에서 손님들을 위해 음악을 틀고 노래를 부르며 춤까지 추게 되면서 아예 가요계로 진출하게 된다. DJDOC R.ef가 대표적이다.

1981년 8월 1일 MTV가 미국 전역에 뮤직비디오를 송출하기 시작한 직후 듀오 버글스가 ‘Video killed the radio star’란 곡을 히트시키며 TV가 라디오를 몰아낼 것을 암시한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예언은 딱 들어맞았다. 그리고 DJ는 이미 오래 전 사양직업이 됐고, 그렇게 스타DJ 김광한은 조용히 팝송애호가들에게서 멀어진 뒤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김광한은 분명히 우리 가요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장본인이다. 만약 그 같은 팝송 전문가가 30~40년 전 팝송보급에 앞장서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K팝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고 대중은 수준 높은 우리 가요를 통해 애환을 달래고 감동을 느끼며 정서함양의 지적인 유희를 즐기는 기회를 더 늦게 가졌을 것이다.

K팝은 물론 전 세계에 유행되는 대중음악의 뿌리는 록이다. 로커들은 ‘Rock will never die!’라는 구호를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김광한은 갔지만 그가 가진 스피릿은 영원할 것이다. ‘KIM's spirit will never die!’

[시크뉴스 유진모 편집국장 ybacchus@naver.com /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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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 DJ | K팝 | 김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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